"음...... 역시 얘는 아니야."
소년은 미련 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앨범에서 눈을 떼고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다 다시 앨범으로 눈을 돌린다.
"분명 우리 학교 애일텐데......"
소년의 눈동자가 주르륵 앨범 속의 얼굴을 훑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원하는 얼굴은 보이질 않는다.
아, 모르겠어. 이 맘때 여자애들 얼굴은 다 비슷비슷하단 말이야!
소년은 문제의 원인이 제 관찰력 부족은 아니리라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의 아가씨(Lady)를 찾는 일은 요원할 테니까.
그는 의미없이 뒤적이던 앨범을 멀찌감치 치워두고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레이디버그. 파리의 영웅이자 그의 파트너인 소녀. 또한 그가......
"으아악! 플랙! 뭐 하는 거야!!"
스크롤이 죽 아래로 미끌어지고 화면 가득 빈 줄이 늘어진다. 소년은 급히 시선을 내렸다. 아니나다를까 그의 주먹만한 새카만 요정이 키보드 엔터키를 깔고 앉아 있었다.
"까망베르가 여기 끼었단 말이야!"
"오, 플랙, 제발. 내가 키보드 위에선 먹지 말라고 했잖아. 이건 청소하기도 힘들다구."
그러거나 말거나 요정은 소년의 낭패어린 표정을 무시하고 키보드 위를 방방 뛰어다녔다. 기어이 치즈를 빼내고 나서야 발작하듯 떨어지던 스크롤이 멈추었다. 소년은 몇 번 휠을 굴려 도로 스크롤을 올리다 까마득하게 작아진 스크롤바를 확인하고는 그냥 페이지를 닫아버렸다.
"레이디버그가 누구인지가 그렇게 궁금해?"
모니터의 빛이 꺼지기 무섭게 그의 요정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평소 치즈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던 게으름뱅이 답지않게 이 문제가 꽤나 흥미진진한 모양이다.
"당연하지, 플랙"
"흐응- 어차피 찾아낸데도 네가 블랙캣과 다르듯 그 애도 네가 아는 레이디버그는 아닐텐데?"
제 몸집만한 까망베르 치즈에 파묻힌 요정은 그 상태 그대로 소년의 머리 주위를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하아- 나도 알아 플랙."
끼악! 소년이 요정의 꼬리를 턱 하고 잡아챘다. 안돼! 내 까망베르!! 소년은 요정을 제 책상 선반 위에 잡아눌렀다. 까망베르으!! 하는 울음소리가 커지자 그제서야 남은 한 손으로 먹다남은 치즈를 얹어주었다. 별 것 아닌 심술이다.
"알지만, 그래도 내가......"
내가 걔를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찾고 싶은 거라구.
소년은 못 다한 말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 일정까지 남은 시간은 5분. 하아- 그래 내가 뭘 하겠어. 소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좋아하게 됐더라. 이제는 생각하는 것 조차 새삼스러울 만큼 당연한 일이다.
적당히 널브러진 자리를 정리하고, 팽개쳐뒀던 앨범도 도로 자리에 꽂고, 마지막으로 방을 한 바퀴 둘러본 소년은 언제 우울했냐는 듯 가뿐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
소년은 항상 혼자였다. 블랙캣의 힘은 해가 지고 나서야 오롯한 탓에 한낮에 악당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선량한 시민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다.
적은 그런 소년을 비웃기라도 하듯 항상 대낮에 나타났다. 힘이 반감되는 낮 동안에 끌어내는 편이 잡기 수월하기 때문일테지만, 그런 값싼 도발에 말려들어 미라클스톤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미라클스톤. 기적의 힘이 깃들었다고 하는 고대의 마석. 적들은 항상 그의 보석을 노렸다. 때문에 소년은, 하필 저가 그 위대한 보석을 찾아낸 바람에 악당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통받았다. 시민을 지키기 위한 영웅이 실은 그 원인이라니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 아닌가?
그 날도 소년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다.
"저쪽인가?"
소년은 어둠 속을 내달렸다. 가능하면 인적이 없는 곳이 좋다.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들키지도 않는데다 블랙캣의 능력이 물 오르는 건 보너스다.
"오! 오늘은 일이 좀 편하겠는데?"
소년은 반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위에 내려섰다. 주변은 들짐승의 울음소리조차 없이 조용했다. 그를 위한 무대나 다름 없다.
소년은 건물 밖까지 쟁쟁 울리는 노랫소리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적이다. 그는 작은 거울 조각을 허리에 매고있던 봉에 묶어 내려보냈다. 어두우니 자칫 잘못하면 위치가 발각될 위험이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내려가는 것보다는 거울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
자, 자. 뭘 하고 있는지 한 번 보자구.
소년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적은 하나. 인질은 없음. 시끄럽게 쾅쾅 울리는 저 레코드 소리가 이번 적의 주 공격무기일 것이다. 참 귀찮은 일이다.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다른 것들보다도 막아내기가 쉽지 않다.
"흐음, 그럼 어디 한 번 속절속결로 가볼까?"
소년은 봉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기척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고양이의 특기. 방심한 틈을 타서 침착하게 등 뒤를 친다.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었다. 검은 나비는 아마 악당이 짚고있는 저 축음기 안에 있을 것이다.
"간다! 고대의, 재앙!!"
소년이 주문을 외우며 튀어나간다. 벽면을 짚고 그 반동으로 적에게 돌진한다. 소년의 손을 감싼 검은 기운이 콘크리트 벽면을 타고 미끄러졌다. 벽은 소년의 손에 닿기 무섭게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안그래도 반쯤 기울어져있던 천장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콰앙! 하고 굉음이 울린다. 소년은 상대가 흐트러진 틈을 타 곧장 축음기로 팔을 뻗었다. 뒤늦게 적이 그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소년은 떨어지는 지붕 파편 위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빠르게 접근했다.
그러나 소년을 막아선 것은 뜻밖에도 그 자신이었다.
'요즘에는 다들 잊어버렸지만, 예전에는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곤 했어요.'
정말 단 한 순간의 망설임이었다.
'이걸 보세요, 도련님! 이 축성기는 제 아버지가 제게 처음으로 준 선물이죠! 아직도 쌩쌩하게 잘 작동된다구요! 하하하'
소년은 어느새 눈 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음표를 피해 뒤로 굴렀다. 발판이 부실해서 그런지 제대로 중심을 잡을 틈도 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으아아! 절로 비명이 새어나왔다.
망했다.
"블랙캣! 너는 끝이야!!"
"이런!"
소년은 쏟아지는 음표의 폭풍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야말로 곡예라 부를만한 기교의 극치에 상대는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쥐새끼같이 촐싹대기는! 에잇-!!"
"흐흠, 나는 쥐가 아니라 고양이인데? 야옹~"
소년은 교묘하게 적의 시야 사각으로만 움직이며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여유로운 말과 다르게 상황은 좀 심각했다. 고대의 재앙을 한 번 날려먹었으니 변신이 풀리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일단 후퇴하고, 다음 번에는 반드시 저 축음기를 부숴야 한다. 소년은 이를 악 물었다.
블랙캣은 위대한 기적의 힘을 가졌지만 검은 나비를 정화할 수는 없다. 악당을 물리칠 유일한 방법은 그 깃든 물건을 통째로 저주해 멸하는 것 뿐.
"젠장!"
설령 그것이 이제는 죽고 없는 아버지가 준 선물이라 할 지라도, 소년은 부숴야만 했다.
그 때였다.
"거기 잠깐 기다려!!"
소녀는 새카만 밤에 달을 등지고 나타났다.
"이 레이디버그가 상대해주지! 못된 검은 나비야!"
그 등 뒤로 부서지는 달빛이 얼마나 환하게 빛났는지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다.
오래기다렸지, 파트너! 직접 보는 건 처음인가? 소녀가 말했다. 소년은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어서오라고, 내 아가씨(My Lady).
그 날 이후로 소년은 더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사랑에 빠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