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것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가까스로 납득했다.
게이트 앞에는 열 명 남짓한 센티넬들이 모여있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으나 그들이 누구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세스는 길지 않은 경험으로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유리벽 너머로 그 떨림이 전해질 만큼 짙게 남은 전투의 잔향에 그녀의 팔에 오도독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분명 이능(異能)과는 연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이능을 현현하는 센티넬들을 눈앞에 두고도 그 염압(念壓)을 느끼지 못 할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간혹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힘이 그들에게서 새어나올 때마다 유리벽이 뒤흔들리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가히 전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전투였다고 했다. 유래없이 대규모의 인력이 동원되었고, 본래라면 센터에서 대기했을 가이드들 역시 상당수 현장에 직접 투입되었을 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적합한 가이드를 찾지 못한 센티넬이 정신 붕괴로 죽는 일이야 이제 와서는 그리 놀라울 것도 아니었으나, 가이드의 보조를 받는 센티넬이 전투 중 사망하는 상황이 대체 어떤 것이었을지, 그녀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전투에 동원되었던 그녀의 동기들은 아직 경력이 짧아 그저 후방에서 대기했을 뿐임에도 끔찍한 후유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세스는, 비록 무척이나 어처구니 없고 다소 귀엽기까지 한 이유로 그녀를 거부해 그녀를 제법 민망하게 했을지라도, 그녀의 파트너인 어린 센티넬의 안위가 궁금했다. 어쩌면, 아주 조금쯤은 걱정을 했을지도 몰랐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사이라는 게 세간이 보는 것 만큼 그렇게 애틋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그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유리벽 너머의 옐렌.P.키옌은 지나치게 멀쩡해보였다. 수 십의 가이드가 현장에 동원되고도 기어이 몇몇 센티넬들이 죽어 나간 그 전투에서, 단 한 명의 가이드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을 저 어린 소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늘 하나 없이 맑은 표정으로 유리창 너머에 서 있었다. 특유의 서늘하고 무뚝뚝한 얼굴에서는 광기의 끝자락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미처 다 가라앉히지 못해 거칠게 날뛰는 다른 요원들의 기운을 특유의 그 강대하고도 날 선 기운으로 찍어누르고 있는 듯 보였다.
세스가 그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내고, 그녀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홀로 온전한 그 한 명의 존재를 슬슬 눈치챘을 때 즈음, 눈 앞의 유리벽이 반쯤 불투명해졌다가, 다시 투명해졌다가, 다시 뿌옇게 흐려지며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그녀의 양 옆에서 대기하고있던 다른 가이드들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리고 비로소 문이 열리고, 마침내 그녀를 발견한 소년의 창백하고도 당황스러운 낯을 보고, 그녀는 가까스로 납득했다.
"어, 당신이 왜, 아니, 벌써...?"
그것을 깨닿는 것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센티넬에게는, 가이드가 필요 없다.
***
“너 요즘 무슨 일이야?”
옐렌은 대답 대신 남자의 뒤로 돌진하는 괴수의 눈알을 터쳐버렸다. 공간이 찌부러지며 끈적한 액체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젠장. 그는 얼굴에 묻은 점액을 거칠게 닦아내며 사납게 고개를 돌렸다. 본래는 날개를 꺾어서 떨어뜨리려고 했다. 조준이 엉성해지고 능력 조절이 점점 투박해짐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기실 그런 이유가 아니었으면 본래 홀로 임무를 수행하던 단독 에이전트인 ‘그’ 옐렌.P.키옌이 다른 요원과 함께 행동할 리도 없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시간도, 이유도 없다. 일주일 전 의료과에서 보고한 그의 정기 검진 결과는 ‘정상’이었다. 옐렌은 눈을 잃고 비명을 질러대는 괴물의 두 날개를 연이어 꺾어버리고, 그대로 다른 괴수에게 집어 던졌다. 이번에는 생각했던 대로 잘 되었다. 단지 그의 정신만이 날카롭게 날이 서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끼에엑-! 괴물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다섯 갈래로 나뉘었다 합쳐졌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옐렌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가 감각하는 세상은 언제나 고요했다.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느꼈으나, 그 중 그 무엇도 그의 평온을 깰 수 없었다. 단 한 사람, 그의 가이드를 제외하고는.
“옐렌!”
“아.”
순간 시야가 벌겋게 타오르며 머리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쏟아져내렸다. 그 끔찍한 악취에 옐렌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끈적하게 피부를 타고 내리는 점액질의 액체가 진절머리났지만 그는 침착하게 괴수의 시체를 넘어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그에게 손수건을 건냈다. 물론 멀찍이 떨어져, 단지 손수건만이 하늘을 부유해 그에게 왔을 뿐이지만, 옐렌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대충 얼굴만 닦고는 그대로 그것을 품에 넣었다. 물론 그의 옷 역시 이미 그 누런 액체에 범벅이 된지 오래이므로 그건 고이 간직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손수건을 걸레짝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을 뿐이었다.
“나중에 빨아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냐, 그냥 가져도 돼. 돌려주지 마.”
“하아-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 그나저나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남자는 여전히 멀찍이 떨어져서, 그러나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투로 인상을 썼다. 그와 옐렌이 함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지는 오늘로 열흘이 조금 넘었다. 아무래도 이 붙임성 좋은 남자는 본래 담당하는 팀이 있던 제법 경력있는 센티넬인 모양인데, 그가 옐렌을 별 거리낌 없이 대하는 거의 유일한 전투 요원이라는 이유로 옐렌과 한 팀이 되었다.
“보시다시피.”
“그야, 뭐 보기에 멀쩡해 보이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남자는 일전에 옐렌과 같은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거나, 혹은 그의 임무 수행을 어떤 방식으로든 지켜본 경험이 있는지 때때로 이렇게 그의 상태에 참견을 하곤 했다. 별달리 해줄 말이 없는 옐렌으로서는 그저 귀찮을 뿐이었지만, 스스로의 상태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그 역시 느끼고 있기에 뭐라고 하기에도 난감했다.
“정 걱정되시면 이번 임무가 끝나고 다시 한번 검진을 받아보겠습니다.”
“아니, 아니, 그건 그냥 평소에도 하는 거잖아! 너 가이드는 어쩌고?”
가이드. 옐렌은 남자의 말에 잠깐 주춤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지금 제 상태야 옐렌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다소 문제가 있긴 했으나 어쨌든 사소한 정도였고, 그건 그의 가이드와는 아무 상관 없는 문제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옐렌은 어쩔 수 없이 그 녹빛 눈동자를 떠올리고야 마는 제 알량한 인내심을 비웃었다. 그녀를 보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리고 그건 지난 1년간 그가 내내 바라 마지않던 일이기도 했다. 가장 마지막에 만났을 때 어땠더라. 그는 결국 그녀에게로 흐르는 제 생각을 되돌리는데 실패했다.
‘오랜만이네?’
‘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저, 오늘이 몇 일이죠?’
‘16일이야. 뭘 생각하는 거야? 접근 금지, 그거 벌써 끝났어.’
그리 말하는 그녀는 별로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그녀가 별달리 상처받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데에 안심했다가도, 다시 한 번 비참해지고야 마는 제 자신에 적잖이 짜증이 나 그는 부러 퉁명스럽게 답했다.
‘임무가 길어져서, 끝난 줄 몰랐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우스운 답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 접근 금지는 옐렌이 정말이지 고심하고 고심해 겨우 내린 결론이었다. 옐렌은 제 눈 앞에 놓인 이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 아무리 되뇌어도, 후에 아무리 끔찍하고 비참한 헤어짐이 기다릴 줄 알아도, 번번이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고야 말면서 그는 스스로를 신뢰하는 게 - 적어도 그녀를 상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을 힘겹게 인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기어이 그녀를 제 시야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조심해, 옐렌!”
굉음과 함께 시야가 둘로 갈라졌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두 쪽으로 쪼개는 듯한 그 섬뜩한 소리에 옐렌은 순간 정신을 놓을 뻔했다. 그러나 곧 익숙한 열기와 함께 세상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전신이 예민하게 달아올랐으나, 센티넬인 옐렌에게 있어 그것은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이게, 여기로 도망쳤었군? 한 달 만이던가? 어이쿠!”
남자는 비뚜름한 웃음을 입에 걸고 괴물을 마주했다. 그는 짐짓 여유로운 척을 했지만 그가 그것을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도 옐렌도 알았다. 갑자기 땅에서 튀어나온 그것은 옐렌도 잘 아는 종류였다. 지난 대토벌 때에 놓친 여왕 개미 한 마리는 이미 그 세력을 상당히 회복한 듯 보였다. 그에 반해 이쪽의 상황은 처참했다. 남자는 제법 괜찮은 전투 요원이지만 이미 한차례 전투를 끝냈다. 경력 있는 베테랑이니 예정에 없는 괴물의 출현을 어느 정도는 대비했을지 모르지만 그게 이런 대형 괴수에게까지 먹힐 지는 미지수였다. 남자의 정신은 아마도, 지금까지의 관찰에 의하면 거의 한계에 달했을 거고, 옐렌 자신은…….
“피하십시오.”
“뭐?”
옐렌은 다가오는 일개미 두마리를 한 번에 날려버리고 남자에게 소리쳤다.
“센터로 돌아가 증원을 요청하십시오! 평소의 저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지금 전 아마…….”
“옐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여왕 개미가 그 거대한 날개를 휘둘렀다. 거센 모래 바람이 그들을 날카롭게 할퀴었으나, 옐렌의 주위는 마치 무언가에 보호받고 있는 것 마냥 고요했다. 흥분한 개미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었으나 옐렌은 그들을 차례 차례 분쇄했다. 그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며 찢겨나간 괴수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젠장! 기다려! 남자가 소리쳤다. 옐렌은 구태여 답하는 대신 남자의 등 뒤를 쫒는 개미의 머리통을 짓이겼다. 그리고, 남자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제 자글자글 타오르는 것 같이 날카로워진 제 감각을 애써 내리눌렀다. 여러 소리가 섞여 괴이한 감각만이 느껴지는 귓가를 매만지며 옐렌은 마음을 다잡았다. 옐렌.P.키옌의 세계는 고요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
소년의 세계가 하얗게 타올랐다가, 다시 검게 가라앉고, 그럴 때마다 괴물들이 뭉텅이로 타올랐다. 허리부터 절반이 잘려나가 머리만 남은 여왕이 기이한 소리로 울 때 마다 일개미들이 뭉쳐들어 기괴한 성을 쌓았다. 그리고 소년이 그 성을 무너뜨리면, 살아남은 괴물들은 기이하게 꺾인 관절로도 기어이 소년에게 들이닥쳐 그 시체로 길을 쌓았다. 소년은 그 길을 밟고 올라온 다른 개미들 역시 공평하게 찢어발겼다. 그들이 자아내는 소리, 온도, 냄새, 그 모든 감각은 소년의 정신을 천천히 갉아먹었다. 소년은 그 지옥도를 바라보며 그녀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언제나와 같은 정사 후의 일이었다.
‘그래도 접근 금지는 너무 했어. 얼굴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하는데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 줄 아니?’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나빴어요. 나는…….’
‘알아. 이제 알았어.’
그녀의 그 말에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던가. 그래도 섭섭하다고 생각해 준 것에 기뻐했던가? 소년은 잘 이어지지 않는 사고를 억지로 이어갔다. 바닥을 적신 괴물의 피가 기분 나쁘다. 피에서 피어나는 김때문에 시야가 흐렸으나 날카롭게 벼려진 소년의 감각에는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너무 많은 것이 보이는 것은 소년에게 고통 밖에 되지 않았다.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는 공기의 감촉에 소년은 진저리를 쳤다.
‘내가 그동안 너한테 너무했지?’
소년은 끓어오르는 감각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리움을 아프게 인정했다. 그녀가 보고싶다. 얼마나 상처받더라도, 그리하여 스스로의 어리석은 선택을 원망하게 될지라도, 그녀가 보고싶다. 소년은 사실, 내내 그녀가 보고싶었다. 그녀와 함께할 때에도, 함께있지 않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소년을 괴롭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었다. 뇌를 약물에 쳐넣어 진탕을 만드는 것 처럼 진득하게 달라붙는 이 끔찍한 감각도 그 염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은 내내 가장 거슬렸던 그 감각의 정체를 알아내고야 말았다. 제 목을 죄고 손발을 묶어 불에 달구는 듯한 그 소름끼치는 감각. 그것이 스스로의 염압(念壓)임을 깨달은 순간, 소년은 자신이 더이상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다.
염압이라는 게, 그러니까 생각에 의한 압력이죠.
여기서는 센티넬이 이능을 발현할 때 나타나는 이능에 의한 압박감을 표현하기 위해 썼지만, 사실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애초에 센티넬의 능력인 초능력이라는 게 사고(思考)에서 시작하는 힘이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