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 :: 비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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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크슬레 합작]
Aldnoah.Zero 현대 세계관 AU :: A/Z in Britain
<슬레인 - 자츠바움 가(家)의 도련님 // 하크라이트 - 자츠바움 재단의 후원을 받는 대학생> 이란 설정입니다.


  슬레인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은 막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평소라면 도서관에 들렸겠지만, 그 때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원래부터도 썩 계획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대학에 오고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은 모든 일들을 전부 내일로 미루고 싶은, 바로 그런 순간.

  우물쭈물하는 모양새가 딱 봐도 1학년 같았다.

  ‘저기, 그, 사학과 슬레인 선배님 맞으시죠? 오늘, 음, 하크라이트 오빠가 학교에 오질 않아서, 혹시 뭘 아시나 하고…….’

  그 여자애는 꽤나 예뻤다. 겨우 그걸 물으러 인문대까지 찾아온 게 퍽 부끄러웠는지 말하는 내내 제대로 고개를 들질 못했다. 아니면 단순히 저가 어색해서 그랬거나. 그리고 딱 봐도 하크라이트를 좋아하는 티가 났다.

  ‘미안, 잘 모르겠는데.’

  정말이었다. 일부러는 아니었다. 정말로 몰랐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알았더라도 이렇게 대답했을 것 같은 느낌이 나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하고 소녀가 무리로 돌아갔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별 것 아닌 일이었으나 마치 누군가의 고백 장면을 엿 본 것만 같은, 그런 찝찝함.

  뭔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소녀도 소녀였지만, 그 뒤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녀석들이 그저 이 장면을 구경이나 하려 쫓아온 건 아닐 터였다. 누구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하크라이트의 소식이 궁금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겨우 하루 학교를 빠진 것뿐인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슬레인은 하크라이트의 집을 찾으면서도 이게 과연 잘 하는 짓인가 싶어 몇 번이나 망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히 충동에 따른 결과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만 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로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엔 속이 영 불편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냥 처음부터 기분이 나빴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왜 하필 오늘인지 모르겠다고, 슬레인은 생각했다. 오늘은 제 일로도 머리가 꽉 차서 도저히 하크라이트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데, 왜 하필 오늘인 걸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는 구태여 발을 옮겼다.

  하크라이트가 편입해 온 것은 지난 봄의 일이었다. 이 나이 많은 1학년 편입생과는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다. 미련하게도 굳이 매일같이 상경대 도서관을 들락거리던 시절의 일이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애초에 저가 자츠바움 가(家)의 사람이라는 자각조차 희미한 때였다. 이름이나 들었지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어 슬레인은 그가 저를 알아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는 그냥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그것이 하루 사이에 두 번, 세 번 계속되자 이게 무슨 인연인가 싶었더랬다. 그게 계기였다. 그리고 그게 전부이기도 했다.

  그 뒤로 하크라이트는 늘상 슬레인과 함께 다녔다. 제 문제로 한참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라서 솔직히 그와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슬레인은 거의 제 마음대로였고, 하크라이트가 능력껏 그 뒤를 쫓아다녔을 뿐이었다. 딱히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그랬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잘 따르나 싶었는데, 그렇다고 그걸 직접 물어보기는 좀 뭐해서 아무래도 나이가 많다보니 신입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그런가보다 하고 이해했더랬다. 그렇게 생각하니 꼭 옛날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해였다.

  그 때 찾아온 애들이 몇 명이더라. 어쩌면 단순히 같이 해야 할 과제가 있어 찾은 걸 수도 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표정을 보면 안다. 모를 수가 있나. 가슴이 답답했다.

  슬레인은 미묘한 기분으로 벨을 눌렀다. 답이 없다. 하크라이트 씨. 하크라이트 씨. 두어 번 더 불러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났다. 드디어 제가 하려던 짓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쳐도 되나? 무례하다고 화를 내면 어쩌지? 얼마 전까지는 그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생각해보니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집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있었다면? 저 문이 열리고, 의 경멸에 찬 시선을 받게 되었을까.

  돌아갈까, 하고 슬레인은 생각했다. 그 순간 낮의 일이 생각나지만 않았다면 틀림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 여자애, 하크라이트를 ‘오빠’라고 불렀었다.

  ‘그 하크라이트 씨 하고 부르는 것 그만 두면 안 됩니까?’

  ‘아, 저는 이게 편해서……. 혹시 듣기 불편합니까?’

  퍽 오래된 기억이었다. 이미 옛날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 게 생각난 건지 모르겠다. 슬레인도 하크라이트와 친했다. 아니 이제 생각해보니 별로 그런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그 여자애보다는 친할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그렇게 매일 찾아오진 않았겠지. 근데 그게 찾아 온 것이었나? 어쨌든 늘 먼저 상경대로 간 것은 슬레인이었다. 그는 자꾸만 ‘하크라이트 씨’하고 불렀던 제 목소리가 떠올라 괜히 짜증이 났다. 우리는 이만큼이나 친하다고 과시라도 하려는 양 가방 속을 뒤진다. 얼마 전 도망칠 곳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오라며 억지로 넘겨받았던 열쇠가 기억난 탓이다.

  “계십니까? 하크라이트 씨.”

  문은 꽤 무거웠다. 실례하겠습니다. 작게 말하고는 방 안에 들어섰다.

  처음 느낀 것은 적막함이다. 방 안에는 차가운 냉기가 돌았고, 대답 없는 목소리만 의미 없이 울릴 뿐이었다. 슬레인은 괜히 민망해졌다. 주인 없는 빈 집에 객이 먼저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역시 잘못한 걸까. 그냥 갔어야 했나. 막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안쪽 방에서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문은 닫혀있었고, 무언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너무 희미해서 최대한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무척 불길한 느낌이 났다.

  슬레인은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았는데 문은 미끄러지듯 안쪽으로 열렸다.

  “세상에, 하크라이트 씨!”

  “하아, 하아-”

  하크라이트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 안이 후끈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차갑다고 느꼈던 게 거짓말 같았다. 문 안쪽의 공기는 불길한 열기로 뜨거우리만치 달아올라 있었다. 적어도 슬레인은 그렇게 느꼈다. 하크라이트가 간간히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이불이 엉키며 기분 나쁜 소리를 낸다. 침대 옆에는 언제 꺼내둔 건지 모를 물통과 약들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빈 컵이 굴러다녔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크라이트 씨, 괜찮습니까?”

  “슬레인, 님?”

  “예, 접니다. 정신이 드십니까?”

  슬레인은 하크라이트가 갑자기 일어나려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무 당황해서 그대로 밀어버렸는데, 그게 어지간히 충격이 컸는지 하크라이트는 제 이마를 짚고는 다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잠깐 몸에 손이 닿은 것만으로 놀랄 만큼 뜨거웠다. 이렇게 열이 높은데 그렇게 사정없이 밀어버렸으니!

  그냥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슬레인이 혼자 땅굴을 파고 들어갈 동안 하크라이트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슬레인, 님, 하아- 여긴 어떻게…….”

  “아, 그게.”

  뭐라고 대답하지. 슬레인은 이 당연한 질문에조차 너무 당황해서 그만 제 혀를 씹었다. 입 안부터 올라오는 둔탁한 고통에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아니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건 그것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랬다. 애초에 여길 찾아온 것부터가 그냥 충동이었다. 너한테 나 말고도 친구가 있었다는 게 충격적이어서,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도, 도망칠 곳이 필요하면, 오라면서요.”

  슬레인은 결국 전에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늘은 내내 기분이 별로였다. 굳이 따지자면, 현실에서 좀 도망치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하크라이트는 슬레인이 적당히 얼버무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도 기쁜 듯이 웃었다.

  “으으, 죄송합니다. 꼴이 변변찮아서…….”

  “아, 아뇨. 그보다 괜찮은 겁니까? 병원은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인다. 슬레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또 일어나려고 하는 걸 보면 하크라이트는 제 상태가 정말 괜찮은 줄 아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그를 다시 눕히고 슬레인은 그 옆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별 것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웠다.

  “좀 누워 있어요.”

  “하아, 괜찮습니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그래요.”

  “그래요. 그러니까 그냥 누워주세요.”

  공기가 너무 더웠다. 환기를 해야겠는데 창문을 열었다간 하크라이트가 추워할 것 같았다. 일단 온도부터 재야하나? 잔병치레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당최 간호란 걸 받아 본 적이 없어 뭘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슬레인은 일단 바닥을 굴러다니던 컵부터 주웠다. 그냥 쓰기엔 찝찝하니 닦아서 써야할 것 같다. 약도 문제였다. 약상자를 그냥 통째로 가져왔는지 진통제, 소화제에 유통기한이 지난 비타민제도 끼어있었다. 아마 아프니 약을 먹긴 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냥 통째로 들고 온 모양이었다.

  “좀, 머리가 아픕니다.”

  “열이 올라서 그래요. 체온이 얼마나 돼요? 아, 체온계가 어디 있죠?”

  “으, 없습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괜찮아.”

  체온계가 없는 게 죄송할 일은 아닌데. 슬레인은 대충 그를 도닥였다. 그는 머리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말투도 좀 이상했다.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아파서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저도 지금 제 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큰일 날 일이다.

  “음, 그러니까, 우선 환기를 좀 합시다. 잠깐 추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네, 슬레인 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슬레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스프링이 이리 저리 튀었다. 그제서야 아뿔싸 했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방문을 활짝 열었다. 바깥 방이 충분히 추우니 바로 창문을 여는 것 보다는 이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창문도 살짝 열어뒀다. 5분 정도면 되겠지. 이제 또 뭘 해야 하지? 등 뒤가 따끔따끔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 순간부터 하크라이트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안다. 뭐라고 말도 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지러우니까 말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마냥 관찰 당한다는 게 이렇게 부끄러울 줄은 몰랐다.

  “으, 춥습니다.”

  “네, 압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금방 다시 닫을게요.”

  “그래도 추워요.”

  하크라이트는 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거슬리는지 계속 끙끙거렸다. 아까부터 어린애마냥 칭얼거리는 게 제 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지만, 평소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좀 뿌듯한 것 같기도 했다. 가만 보면 좀 귀여운 것도 같다.

  “지금 열이 아주 높아서 그래요. 약은 먹었습니까?”

  “으, 하아, 모르겠어요.”

  총체적 난국이다. 놀랍게도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후, 잠시만.”

  “아? 어딜 가십니까?”

  “예?”

  “어디 가요? 가지 마세요.”

  하크라이트가 슬레인의 옷 끝을 잡고 늘어졌다. 차마 당기진 못하고 마냥 낑낑대는 꼴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안돼요. 가지 마요. 당황스럽다.

  “안 가요. 여기 주방을 좀 쓸게요. 약을 먹어야죠. 식사도 아직일 테니 간단한 죽이라도 만들어 오겠습니다.”

  “안, 만들어도 됩니다. 하아, 저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추워요. 정말로.”

  “하크라이트 씨, 지금 많이 아파요.”

  “아니요, 안 아픕니다. 저 괜찮습니다. 아니 많이 아픈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기 있어요. 어디 가지 마요.”

  이를 어쩌지. 슬레인은 잠깐 고민했다. 그냥 옷 끝을 살짝 쥐고 있을 뿐이라 떨쳐내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아플 때 거부당하는 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는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약은 먹어야 하는데.

  “후……. 알겠습니다. 좀 더 여기에 있겠습니다.”

  고민은 짧았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고,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약은 좀 더 천천히 먹어도 되었다. 게다가 그가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침부터 계속 혼자 앓았다는 건데 충분히 외로울 만도 했다.

  슬레인은 책상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한 손으로는 하크라이트의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테이블을 정리했다. 감기약은 없고 그나마 해열제는 있다. 빈속에 먹을 수 있는 종류는 아니라 역시 뭐라도 먹이긴 해야겠다고 막 생각할 즈음이었다.

  “손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요.”

  “아까는 춥다더니요.”

  “으, 지금도 춥습니다. 그런데 뜨거워요.”

  하크라이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제 손을 잡고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저가 한 소리가 말이 안 된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그냥’ 아프다고 칭얼대는 게 꼭 어린 아이 같다. 아, 귀엽다.

  “하크라이트 씨, 지금 이러는 거 평생 비밀로 해줄게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즐거웠다. 아픈 사람을 눈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중에 가장 그가 가깝게 느껴졌다. 분명히 기분이 나빴던 것 같은데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으으, 그러지 마세요, 슬레인 님.”

  “네? 뭐를요?”

  “그렇게, 막, 웃지 마세요.”

  하크라이트가 남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으아- 말했다. 말했다. 하고 고개를 흔든다. 온 몸이 붉게 달아오를 만큼 열이 장난이 아닐 텐데, 저렇게 머리를 흔들면 위험하지 않을까. 말하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지 그는 혼자서 이리 저리 뒤척였는데 그 와중에도 슬레인을 잡은 손만은 얌전했다.

  으, 안 돼. 어떡해. 죽을 것 같아. 하크라이트가 신음했다. 슬레인은 뭐라고 반응해야할지 몰라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열이 끓는데 그렇게 움직였으니, 지금쯤이면 온 세상이 뱅 뱅 돌고 있을 터였다.

  “하크라이트 씨. 좀, 진정하세요.”

  슬레인은 하크라이트의 손 위로 그의 이마를 짚었다. 닿은 손끝이 뜨겁다. 제 손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감각만으로는 정확히 얼마나 뜨거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미열 수준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위험한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병원에 가자고 해도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체온계가 있었다면 좀 더 확실했을 텐데.

  “으, 슬레인 님. 방금 말한 건 잊어주세요. 지금, 좀, 정신이 없어서.”

  “네,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예? 뭘요?”

  “네?”

  “뭘 이해합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에? 아니, 네, 죄송합니다.”

  “흐, 슬레인 님이 뭐가 죄송해요?”

  “아니, 그러니까…….”

  “제가 죄송해요. 선배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정말로 하나도 안 나빠요.”

  대화를 못 따라가겠다. 그러니까 이게 그거인가. 미싱 링크(Missing Link)?

  “아, 네. 감사합니다. 하크라이트 씨도 하나도 안 나쁩니다.”

  결국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슬레인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간질간질 하다고 해야 하나. 단순히 아파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중요한 걸 모르고 있는데, 그걸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이런 식으로 알아서는 안 됐는데……. 슬레인은 초조해졌다. 그동안 그가 최선을 다해 감추어왔던 바로 그것. 그 일부를 훔쳐본 것만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틀림없이 평소에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크라이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변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슬레인은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아프니까 제대로 간호라도 해주고 싶은데, 정작 저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열이 높으니 열을 내려야하는데, 열을 내리려면 약을 먹어야하고, 약을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하고, 그런데 또 나가지는 말라고 하니까 지금은 할 수가 없다. 아픈 건 그인데 괜히 제 머리가 핑핑 돌았다. 가만히 서로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괜히 더 긴장이 됐다. 안 되겠다. 물수건이라도 가져와야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슬레인은 그야말로 벌떡 일어났다. 말릴 세도 없이 자리를 뜬다. 심란했다. 기분이 좋은 듯도 나쁜 듯도 했다. 엄청나게 혼란스러운데, 그 이유를 모르겠으니 속이 탔다. 애초에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린 걸까. 이제와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새삼스레 의문이 들었다. 이상하리만큼 그만 둘 생각이 들지 않았더랬다. 평소 같으면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일. 그랬을 텐데, 틀림없이 그랬을 텐데, 지금은 이곳에 오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마치 처음부터 오늘은 하크라이트를 만나러 올 예정이었던 것처럼. 왜? 위로를 받고 싶었나?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던가.

  슬레인은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자 괜히 짜증을 냈다. 이렇게 어질러 놓으니까 수건 하나 못 찾는 게 당연하다고 위로하기엔 집안이 지나치게 정갈했다. 나가지 말랬는데, 그래서 지금 약도 못 먹이고 있는데, 근데 무슨 물수건이야! 바보! 멍청이! 가지 말라고 애원하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가 방을 나가서 한참이나 헤매다 간신히 물수건 비슷한 것을 찾아 들어올 때까지, 의외로 하크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방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슬레인은 물이 찬 대야를 적당히 내려놓고 엉거주춤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하크라이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저 얌전했다. 뭔가 괜히 미안하고, 크게 잘못한 것만 같다.

  “그, 똑바로 누워줄래요?”

  하크라이트가 기울였던 자세를 펴고 똑바로 눕는다.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끊어질 듯한 적막이 흘렀다. 슬레인은 기묘한 긴장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이마, 뺨, 턱을 지나 목덜미에 닿는다. 그 순간 하크라이트가 슬레인을 멈춰 세웠다. 손목을 꽉 붙잡은 손이 더 할 나위 없이 뜨겁다.

  “들었, 습니까?”

  하크라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었으나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게 있었다. 슬레인은 숨을 참았다.

  “뭘, 말입니까?”

  “들었군요. 그렇겠죠. 그랬을 겁니다.”

  슬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크라이트는 여전히 그의 팔을 잡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슬레인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그는 오늘 아침에야 겨우 그 소식을 들었는데, 저보다도 그가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게 어쩐지 이상한 듯 이상하지 않은 듯 기분이 미묘했다. 이 상황에 제일 먼저 묻는 게 그거란 것도 퍽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는 비가 많이 왔었지. 아픈 건 그 때문이었나. 슬레인이 부드럽게 하크라이트의 손을 떼어냈다.

  “죄송, 합니다. 슬레인 님.”

  지키고 싶었는데, 막을 수가 없었어요.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였다. 약간 울음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크라이트는 마치 슬레인의 기분을 함께 느끼는 양 흐느끼고 있었다. 슬레인은 그런 그를 천천히 감싸 안았다.

  “당신이 뭐가 죄송해요? 하크라이트 씨, 나를 봐요.”

  “저는, 저는, 당신이…….”

  “괜찮아요. 나는 지금 정말로 괜찮아요.”

  오늘은, 처음부터 기분이 나빴다. 남은 모든 일들을 전부 내일로 미루고 싶은, 바로 그런 순간. 원래부터도 썩 계획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대학에 오고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랑했고, 실패했다. 너무 소중해서 차마 말조차 하지 못한 그런 사랑이었다. 그 소식을 바로 오늘 들었다. 그것이 못내 충격적이었다.

  “저는, 이기적이에요.”

  하크라이트는 열에 달뜬 목소리로 흐느꼈다. 맞닿은 어깨에서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곳에, 도망쳐 왔다고 했을 때는 기뻤습니다. 아니라는 것 알아요. 그래도 기뻤습니다. 오늘 아파서 다행이에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파서 다행이라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는, 이거면 됩니다. 당신이 저를 의지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정말, 그것만으로, 기뻐서, 저는…….”

  “하크라이트 씨.”

  “제가 더 많이 노력할게요. 돌아봐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미안해요. 죄송, 합니다.”

  “하크라이트, 씨…….”

  슬레인은 오늘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웃으며 제게로 왔다. 알려주고 싶은 게 있다고, 아마 들으면 놀랄 거라고. 슬레인이 매일같이 저를 보러 상경대에 출석도장 찍는 줄도 모르고 천진하게 말했다. 그 때 이미 끝을 직감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충격적이었는지 당시에는 잘 몰랐었다. 다만 무언가 아주 큰 것이 변했노라고, 그토록 소중히 간직했는데 사실은 이미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노라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다. 그건, 차마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하크라이트 씨. 여길 봐요.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이 너무 엄청나서, 거기에 너무 놀라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냥 도망치고만 싶었다. 아마 이런 일이 없었다면 여태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슬레인은 생각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기분이 나빴던 것은 그보다 더 먼저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야말로 처음부터, 슬레인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와중에 너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아마 들으면 틀림없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슬레인은 천천히 그를 품에서 놓았다. 그에게 놓여나자 하크라이트가 급하게 슬레인의 손을 붙잡았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절실해 보여 슬레인은 자유로운 한 쪽 손을 뻗어 하크라이트의 뺨을 쓸었다.

  “슬레인, 님?”

  오늘은 하루 종일 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레 휴강 통지를 받아 오전 시간이 통째로 비었더랬다. 하여 조금 일찍 도서관을 찾았다. 일부러 그가 있을법한 곳을 골랐다. 그런데 그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약속을 하고 만나는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본래 있어야 할 시간도 아니었으니까. 아쉬웠지만 그 뿐이었다. 하지만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되어서도 내내 보이지 않았다. 그와 만난 그 날 이래로 혼자 지낸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혼자였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화가 나 있기도 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러다 그녀를 만났다.

  ‘들어봐요, 슬레인.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요. 아마, 들으면 틀림없이 깜짝 놀랄 거예요.’

  거기까지 듣고 이미 다음에 나올 말을 짐작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 하여 제 땅이 무너질 듯해도 여기서는 그냥 웃어드리자 마음먹던 참이었다.

  ‘제게 연인이 생겼어요, 슬레인.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 말하며 그녀가 웃었다. 타들어가는 제 속을 비웃듯 이때까지 봐 온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래서 그도 웃었다. 고백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끝난 제 사랑이 안쓰러워 더 밝게 웃었다. 그것이 끔찍하게 충격적이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진즉 포기했던 것처럼. 스스로가 그러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화가 났다. 그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졌고,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다 끔찍했다. 무엇보다 저 자신을 제일 믿을 수가 없었다. 전부 저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제 문제였다.

  “하크라이트 씨, 혹시 저를 좋아하십니까?”

  “……슬레인, 님?”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파서 몸을 가누기는커녕 정신도 잘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그 뜨거운 손으로 제 손을 꽈악 잡아왔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언제 기분이 나빴냐는 듯 이토록 즐거운 기분이 된다는 건, 아아, 그래. 틀림없다. 깨닫는 것이 너무 늦었을 뿐이었다. 슬레인은 그가 대답하기 전에 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크라이트 씨.”

  아직,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이런 식으로 알게 되어선 안됐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보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으로 고백한 것이니까.

  “으으, 슬레인 님.”

  “네, 하크라이트 씨.”

  “정말, 정말입니까? 저는, 그러니까, 아니, 아니에요. 말하지 마세요. 저는 정말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 세 번의 마주침이 온전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함께했다. 그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라는 안이한 이유로 그의 호의를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이렇게 될 것은 예정되어 있었을는지 모른다.

  “하크라이트 씨.”

  “네, 슬레인 님.”

  “하크라이트 씨.”

  “네”

  “하크라이트 씨”

  “으, 그 씨 붙이는 것 좀 그만 둬주세요. 그리고 그, 경어도 좀…….”

  “음, 하크라이트 형?”

  “……하크라이트”

  “풉. 네, 아니, 그래. 하크라이트.”

  “으으, 어떡해. 죽을 것 같아요. 으아아-”

  “그건 곤란한데.”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자꾸 고개를 돌리면서도 제 손 만은 꽉 잡고 놓지 않는 모습을 보며 슬레인이 키득거렸다. 손에 얽히는 온기가 사랑스럽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아아, 그래. 이게 바로…….

  이렇게나 빨리, 아니 이제서야, 이런 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을.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그나마도 이제 도착한 것은 전부 하크라이트 덕분이었다. 물론, 그래. 어쩌면 그는 이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슬레인은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 하크라이트가 제정신으로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괜찮았다. 기억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울 것 같았다. 슬레인은 이 미련한 남자가 언제까지 제 마음을 숨기고 있을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 어쨌든 이번에야 말로 먼저 고백한 것은 저였으므로.


* * *


  6시 30분. 하크라이트는 습관적으로 눈을 떴다. 딱히 알람을 맞춰두지 않아도 그는 으레 이 시간이면 잠을 깨곤 했다. 원래 부지런한 성격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고, 단순히 바쁜 일상에 몸이 지나치게 잘 적응한 탓이었다.

  끙. 일어나기 싫다. 하크라이트는 일어나려다 말고 도로 자리에 누웠다. 생각으로는 분명 절반은 일어났던 것 같았는데, 막상 도로 눕고 보니 움직였던 건 눈꺼풀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제대로 정신이 들긴 한 건가? 꿈과 현실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드문 일이었다. 썩 부지런하진 못해도 성실함만큼은 최고인 몸이었는데, 오늘은 어째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뭔가 끈적했고, 왠지 약간 찝찝한데다, 머리도 좀 아픈 것 같았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어려웠다. 하아. 어디보자. 오늘이 수요일이던가? 그럼 괜찮겠군. 하크라이트는 일어나기를 포기했다.

  조금 더 쉴 생각이었다. 몸은 무거웠고 자세는 불편했다. 본래 얌전히 자는 편이라 이런 일은 드물었다. 어제는 겨를이 없어 앓던 채로 그냥 잠든 탓인가, 하고 하크라이트는 그나마 있는 온 힘을 다해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냥 자기에는 허리가 너무 아팠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스, 슬레인 님!’

  고개를 돌리자 찬란한 백금발이 눈앞에 쏟아진다. 순간 잘못 봤나 싶었는데 곤히 자는 듯 새근새근 숨까지 쉬는 걸 보면 진짜인 것 같다. 하크라이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직 꿈인가? 팔이 끊어지게 아픈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 팔이 아픈 이유가 또 문제였다. 아니 비단 팔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깨닫고 보니 모든 게 다 문제였다.

  “허억-!”

  가슴에 와 닿는 가느다란 머리칼이 녹을 듯이 부드러워 간지럽다. 팔에 닿은 뺨은 무척이나 말랑했다. 너무 아파서 감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내쉬는 숨결에 털끝이 곤두설 정도로 예민했다. 슬레인이 가볍게 뒤척일 때 마다 온 신경이 다 거기에 쏠리는 것만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살갗에 와 닿는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따뜻하고 매끈한 것이 사람의 피부인 것 같은데,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맨살이다. 틀림없다. 하크라이트는 우선 제 차림부터 살폈다. 마음 같아선 이불이고 뭐고 다 뒤집어엎고 확인하고 싶었지만, 우선 제 품에 안긴 이가 깨서야 곤란하니 그냥 눈알만 굴릴 뿐이었다. 대충 느낌상 바지는 입고 있는 것 같다. 다행이었다. 잠결에 몹쓸 짓이라도 했었다간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터였다.

  “으음, 하크라이트…….”

  그 때 슬레인이 움직였다. 가늘고 긴 팔이 슥- 하고 빠져나가 그대로 하크라이트를 끌어안았다. 토닥토닥, 리듬감 있게 등 뒤로 손가락이 닿았다 떨어진다.

  “오늘은 더 자도 돼…….”

  그건 물론, 하크라이트도 안다.

  “자야지. 착하다.”

  등 뒤의 손이 부드럽게 올라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그 손이 등에 닿았을 적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가지런히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하크라이트는 저 멀리 승천하려는 정신을 억지로 잡아 내렸다.

  그러니까…… 어제는 너무 아팠다. 그야 물론 그 비를 다 맞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어떤 식으로든 탈이 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제대로 앓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이지 끔찍하게 아팠다. 어라? 지금 슬레인 님이 여기 와 계신 건 그 때문인가? 내가 아픈 줄은 어떻게 아시고? 평소 멍청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저가 생각하기에도 머리가 잘 안 굴러갔다. 아니 잠깐만, 그 전에 그 소식을 들으셨을까? 안되는데, 분명 슬퍼하실 텐데. 그런데 여기 계신 걸 보면 괜찮은 거 아냐? 끼릭끼릭 하고 기름칠 안 된 기어마냥 제 머리통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하크라이트는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솔직히 아무 기억이 나지 않기도 했다. 떠오르지 않는 걸 억지로 떠올리려고 해도 무리다. 분명히 엄청난 걸 들었던 것 같긴 한데, 숨 막혔던 긴장감 정도만이 기억났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현실인지조차 잘 구분이 되지 않았었다. 애초에, 모든 것이 너무 애매했다.

  “착하다, 착하다.”

  슬레인은 여전히 그의 품속에 있었다. 머리칼에 가볍게 와 닿는 그 손길이 지나치게 부드럽다. 잠결에 뭉그러지는 가느다란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편안한 듯 웃고 있는 얼굴에 행복감을 느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의문이 분명 조금 전까지는 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팔은 별로 아픈 것 같지도 않았다. 슬레인이 묘하게 자신을 어린애 취급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는 분명 ‘하크라이트’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적어도 아세일럼 아가씨나 에델리조와 헷갈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호의’는 자신의 것이다. 그것만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하크라이트는 슬레인이 좀 더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쳤다. 적어도 그가 깨어날 때 까지는, 좀 더 이대로 있고 싶었다.


[+덤] 4컷 만화